아리스토텔레스 쇼크, 암흑 시대를 흔들다 II

2022. 5. 24. 20:58역사

반응형

이성과 신앙은 신에게 가는 서로 다른 길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그 당시 교회 이론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일상 세계는 죄악으로 가득 차 있다는 기존의 믿음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도 천상 세계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여겼다. 더구나 그의 철학에 따르면, 세계에 대해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따져 묻는 것은 신에 대한 위협이 아니다. 오히려 논리적인 사유는 신에 대한 깨달음에 이르는 데 도움을 준다. 이렇게 볼 때, 이성과 신앙은 대립되기보다는 서로 보완적인 관계다. 이성을 최대한 발휘하여 신에 대해 캐묻고 더 많이 알게 될수록, 믿음은 오히려 더 강해진다. 그에 따르면, '이성과 신앙은 신에게 가는 서로 다른 길일뿐'이다. 곧 '믿습니다!'식의 묻지 마 신학을 냉철한 교회가 보완해 줄 수 있다는 논리다. 

이성은 이제 비로소 신앙의 억압에서 자유로워지기 시작한다. 물론 교회는 이교됴 세계에서 유입되기 시작한 이 새로운(?) 철학자에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다. 1210년, 교리 논쟁의 중심지였던 파리 교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금서로 정했다. 그런데도 그에 대한 연구는 그칠 줄 몰랐다. 1231년, 1245년, 1263년, 줄기차게 금지령이 내려졌지만 아리스토텔레스 '붐'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1366년,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어 버렸다. 교회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알아야만 신학 교수 자격을 얻을 수 있다고 공표한 것이다.

 

황소고집의 승부사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상 투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그의 사상이 '경쟁력'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슬람 등 이교도와의 전쟁, 교황과 황제 사이의 투쟁이 계속되던 상황에서는 무엇보다도 현실을 보는 냉철한 눈이 필요했다. 더욱이 잦은 논쟁과 명분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철저한 논리가 뒷받침되어야 했다. 논리학의 창시자이자 자연 과학과 정치학의 선구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둘을 모두 제공해 줄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대 논쟁가의 공도 빼놓을 수 없다. 그 당시는 사상의 자유란 생각하기도 힘들었던 시절이다. 종교재판과 마녀 사냥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져,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죽을 수도 있었다. 어지간한 '혁명적 결심'이 서지 않고서야 획기적인 이론을 주장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아퀴나스는 정말 탁월한 승부사라고 할 수 있다. 아퀴나스는 외모부터 위압적이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체구가 너무 큰 나머지 책상을 둥글게 파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배가 너무 나와서 손이 책상에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퀴나스의 고집은 황소고집이었다(실제로 그의 학창 시절 별명은 '벙어리 황소'였다). 시칠리아의 귀족이었던 아퀴나스의 아버지는 그가 부자 수도원인 베네딕트 수도회에 들어가 주교나 수도원장과 같은 성직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렇지만 그가 선택한 곳은 생소하기 그지없는 도미니크 수도회였다. 가난한 탁발승이 되려는 아들의 결심에 가족들은 기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를 성에 감금시켜 놓고 설득에 설득을 반복했지만 이 거구의 황소고집을 끝내 꺾지 못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고집스러움은 학문하는 자세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독서가이자 논쟁가였다. 1252년, 아퀴나스는 파리 대학의 신학과 교수로 초빙되어 마침내 강단에 섰다. 이때만 해도 대학 교육은 대부분 토론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내용을 보면 먼저 교수의 '강의'에 따라 책을 읽고 명상을 한 다음, 책의 내용에 대해 서로 '질문'을 한다. 그 뒤 '토론'이 이어지는데, 자유롭게 난상토론을 벌이는 게 아니라 정해진 순서에 따라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 식으로 진행된다. 교육의 백미는 그다음에 이어지는 '자유토론'에 있다. 이는 사상을 놓고 벌이는 '이종 격투기 시합'이라 할 만하다. 그 주제 역시 '신의 속성은 무엇인가?'와 같은 점잖은 것에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가 식사를 했을 때 음식물은 몸에 흡수된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같은 엽기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했다.

아퀴나스는 사상의 전쟁터였던 파리대학에서도 단연 두드러졌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무장한 그는, 치밀하고 냉철한 논리로 상대교파의 대표들을 격파하곤 했다. 도미니크 수도회 같은 신생 수도 단체는, 게다가 새로운 사상을 들고 나온 교파는 자칫 이단으로 내몰리기 쉬운 법이다. 이 위험한 상황에서 아퀴나스는 냉엄한 논리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기독교 교리를 다시 정립했다. <대 이교도 대전>, <신학 대전> 같은 방대한 저술은 모두 이러한 논쟁을 거쳐 탄생했다. 그는 신앙과 교회의 거의 모든 문제를 다루었고 해결책을 제시했다. 아퀴나스는 정말 '가톨릭'이 '보편적'일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만들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는 균형감각이 뛰어났다. 교회와 세속 군주가 권력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던 그 시절, 어찌 보면 그들의 관계는 지금의 국회와 대통령이 권력을 잃듯이, 교황이 파문 (신도의 자격을 빼앗고 종파에서 내쫓음)하면 황제로서는 기독교인들인 신하들을 거느릴 권위를 잃게 된다. 반면, 대통령이 국회를 행정적인 힘으로 압박하듯, 황제도 교황을 경제나 군사적으로 위협할 수 있었다. 

이 살얼음판 같은 권력 투쟁에서, 아퀴나스는 '중용'에 가까운 해결책을 내놓았다. 먼저 아퀴나스는 국가 쪽 손을 들어 주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본성적으로 사회적 동물이기에, 국가는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더구나 국가는 신이 내린 법, 곧 자연법에 따라 사람들을 다스려 행복으로 이끌어 준다. 그럼 교회는 어떨까? 교회는 국가보다 더 높은 곳에서 위치한 신으로부터의 구원을 추구한다. 그러니 국가는 종교적 구원이나 신에 대한 문제에서는 교회에 복종해야 한다. 그렇다고 국가가 교회보다 못하다는 뜻은 아니다. 국가는 자연법에 따라 사회를 유지하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결국 국가와 교회는 대립한다기보다는 신을 향해 가는 서로 다른 두 길일뿐이라는 것이다.

반응형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십자군 전쟁 II  (0) 2022.05.27
십자군 전쟁 I  (0) 2022.05.26
아리스토텔레스 쇼크, 암흑 시대를 흔들다 I  (0) 2022.05.20
이념으로 갈린 세상 (II)  (0) 2022.05.16
이념으로 갈린 세상  (0) 2022.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