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전쟁 II

2022. 5. 27. 16:58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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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튈지 모르는 폭탄 같은 십자군

십자군이 제1차 원정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이슬람 세계의 무지와 분열이 큰 역할을 했다. 사실, 대다수 무슬림은 십자군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에 그들은 십자군의 침입을 그 당시 흔했던 영토 분쟁 정도로만 여겼다고 한다. 무슬림은 기독교도들이 자신들에게 신앙적 적대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당시는 이슬람 국자의 왕들이 여느 이웃국가들에게 하듯, 다른 이슬람 국가를 치기 위해 기독교 국가에 동맹을 청하는 일이 흔하게 일어났던 시대이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십자군 전쟁은 서로 피 터지게 치고받는 가운데, 이해할 수 없는 전쟁을 정당화해가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은 처음부터 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싸우는 과정에서 상대를 '신앙의 적'으로 만들어 갔다. 기독교에 대항하여 성전, 곧 지하드를 펼쳐야 한다는 생각은 살라딘 대왕(Saladin, 1137~1193 아이유브 왕조의 창시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체계화되었다.

기독교 진영도 마찬가지였다. 템플 기사단이나 튜턴 기사단같이 십자군을 대표하는 '문화 코드'들은 순례자를 보호하고 부상자를 구호하는 가운데 형성되었다. 제대로 된 기사도 정신도 '사자 왕' 리처드 1세(Richard I, 1157~1199 국내 정치에는 무능했지만 전투에서 영웅적 면모를 보이며 중세 기사의 전형으로 평가받았음)를 거치며 비로소 정돈되었다. 모든 것이 투쟁 속에서 만들어졌다.

더구나 200여 년에 걸쳐 여덟 차례나 감행된 십자군 원정은 대규모 군사 행동 치고는 기묘하기 그지없었다. 십자군은 대부분 성지 순례를 하기 위해 '자원봉사로 참여한' 귀족과 병사들로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일관된 지휘 통제는 애초부터 기대하기 어려웠다. 십자군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폭탄과도 같은 존재였다. 작전을 짰다고 해서 그대로 된다는 보장은 전혀 없었다. 심지어 제4차 십자군 원정 때는 이슬람을 치기는커녕 엉뚱하게 같은 기독교 국가인 비잔틴 제국을 공격해 멸망시키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많은 유럽 인들은 비잔틴 제국이 로마 가톨릭 교회가 아닌 그리스 정교회를 믿고 있었다는 이유로 십자군에 갈채를 보냈다. 이처럼 결과를 통해 원래 의도가 이런 것이었다고 정당화해야 하는 기묘한 상황이 적잖이 일어나곤 했다. 게다가 시간이 갈수록 십자군 전쟁은 성지 회복보다는 이단과의 투쟁이라는 성격이 강해졌다. 교회는 자신의 적들을 '신앙의 적'으로 규정하고 십자군 소집을 선포하곤 했다. 이런 가운데 성소 수복이라는 십자군 본래의 의미는 어느덧 퇴색해 가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에 있었던 십자군 국가는 1291년, 아크레가 함락되면서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이미 부패한 교회와 추락할 대로 추락한 교황의 권위로는 더 이상 성지 회복을 위한 대규모 십자군을 조직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십자군은 그 뒤 하나의 '이상'으로 유럽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았다. 십자가를 앞세워 기독교 문명을 전파하고 악의 세력인 이교도를 뿌리 뽑는다는 자부심으로 말이다.

 

십자군은 인류 정신의 바이러스?

십자군은 분명 사상운동이 아니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은 서양 역사에 그 어떤 사상보다도 큰 정신적 영향을 끼쳤다. 대항해 시대에 접어들어 식민지를 개척하던 유럽 국가들은 자신을 새로운 십자군으로 여겼다. 야만적이고 잔혹한 이교도의 땅에 기독교 문명을 전파한다는 사명감은 그들의 탐욕을 정당화시켜 주곤 했다. 더 나아가 19세기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앞 다투어 자기 나라의 십자군 지휘관들을 영웅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영국은 리처드 1세를, 독일은 프리드리히 1세, 프랑스는 고드프루아 드 보용을 치켜세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반면, 이슬람권에서 십자군은 20세기에 접어들 때까지 별 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무슬림은 십자군 전쟁을 '프랑크 족의 침입'이라 부르곤 했다. 그들은 십자군과의 전쟁을 장구한 이슬람 역사에서 잠시 스쳐 지나가는 상처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탄생,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을 거치면서 이슬람 국가들은 십자군의 의미를 다시 곱씹게 되었다. 분열된 이슬람 국가들과 그 틈을 노린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점령, 우월한 군사력을 앞세운 서방 국가들의 간섭은 700년 전의 상황과 너무나 닮아 있다. 오사마 빈 라덴이 '십자군에 맞선 지하드'를 선언하고 사담 후세인 (Saddam Hussein, 1937~2006)이 자신을 '아랍 세계를 단결시킨 새로운 살라딘'이라고 줄곧 주장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십자군은 처음부터 권력 갈등이 빚어낸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과 자비의 종교인 이슬람과 기독교는 결코 적대적인 관계가 될 수 없다. 18세기 유럽의 지성 볼테르(Voltaire, 1694~1778, 프랑스의 계몽 사상가, 작가)는 십자군을 '권력에 미친 성직자들이 벌였던 무자비한 전쟁'일 뿐이라고 단언했다.  전 교황 요한 바오르 2세(Joannes Paulus  II,1920~2005, 십자군 전쟁은 교회가 저지른 죄악의 하나라며 정식으로 참회하기까지 했다.

십자군과 기사도에 불타는 경건한 기사는 지금도 동화나 영화 속에서 동경의 대상으로 그려지곤 한다. 완벽한 이상은 세상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현실에서는 절대적인 선도 악도 없다. 나는 선하고 상대는 없어져야 할 악이라는 생각은 세계를 끝없는 갈등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을 뿐이다.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을 버리면 세상은 '함께' 힘을 모아 해결해야 할 문제들로 가득한 공간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기독교와 이슬람이 꿈꾸는 사랑과 기쁨으로 충만한 세상은 십자군이나 성전과 같은 극단적인 적개심을 버리고 상대에게 손을 내밀 때 이루어진다. 이렇게 볼 때 십자군 정신은 인류에게 관용의 소중함을 잊어버리게 하고 폭력에 휩싸이게 하는 정신의 바이러스에 지나지 않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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