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 전국시대의 혼란을 잠재우다

2022. 5. 8. 21:59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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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벌로 형벌을 없애다

법가의 성공 사례로는 무엇보다 진나라를 꼽을 수 있다. 진나라는 원래 대륙 서북쪽에 처박혀 있던 작은 나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던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제국으로 크게 성장한 데는 상앙(기원전390?~338?, 본명 공손앙)의 공이 컸다.

상앙은 원래 지나라 사람이 아니었다. 진나라 효공(기원전 381?~기원전 338)이 초현령을 거쳐 발굴한 인재로, 위나라 사람이었다. 초현령이란 국가를 이끌 인물을 선발하기 위한 일종의 '국제 인재 공모전'이라 보면 될 듯하다.  그는 법가 특유의 과감한 정책으로 효공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법가라는 말 자체 에서 느낄 수 있듯, 법가 사상가들은 하나같이 '엄격한 법 적용'을 강조했다. '이목지신(移木之信)'이란 사자성어로 알려진 다음 일화는 상앙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상앙은 10미터 남짓한 나무 하나를 도성 남문 앞에 세워 두고 공고를 붙였다. "이 나무를 북문까지 옮기는 사람에게는 10금(金)을 주겠다." 처음에 사람들은 이를 '만우절 농담'정도로 여겼다. 하긴 나무 하나를 잠깐 옮기는데 10금을 주겠다면 과연 누가 믿겠는가? 나무를 옮기는 자가 아무도 없자 상앙은 상금을 옮겼다. "나무를 옮기는 사람에게는 50금을 주겠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한 사람이 나서서 나무를 옮겼다. 그러자 상앙은 두말없이 그에게 상금을 주었다.

이는 공표된 법령은 반드시 지킨다는 국가의 신념을 보여 주기 위한 상앙의 '이벤트' 였던 셈이었다. 그는 벌에 있어서도 누구에게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심지어 앞으로 황제가 될 태자(太子)가 법을 어기자, 그 스승에게 경(鯨)을 쳐 버렸다. 경이란 얼굴에 문신을 새기는 형벌을 말한다. 그런데도 태자가 또다시 잘못을 저지르자, 이번에는 스승의 코를 베어 버렸다. 그의 법에는 예외도 관용도 없어서, 그는 이른바 경죄 중벌의 원칙에 따라 사소한 일에도 무거운 형벌을 내렸다. 상앙은 "형벌이 결국 형벌을 없앤다."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법이 엄하면 감히 어길 엄두를 못 내게 되어 범죄율이 크게 떨어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사마천이 지은 <사기>에 따르면, 상앙이 집권한 지 10년도 안되어 진나라는 "도적이 사라졌을뿐더러 땅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주워 가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안정되었다고 한다. 결국 그의 말대로 형벌이 형벌을 없애는 상황이 이루어진 것이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마라

 

그러자 부국강병은 엄격한 법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앙은 온 국민이 농사와 전투, 이 두가지에만 몰두한다면 나라는 부강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결론 아래, 그는 원칙주의자답게 가장 교과서적인 방법으로 국가를 개혁했다. 따지고 보면, "인(仁)으로 나라를 다스려라.", "덕(德)으로 다스려라." 하는 '공자님 말씀'도 그 당시 상황에서는 일종의 정치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인구가 곧 노동력이자 국력이었던 시절, 무엇보다도 시급한 과제는 사람 수를 늘리는 일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좀 더 자유로운 곳에서 살고 싶어 하는 법이다. 공자가 강조한 인과 예는 그 시절 권력자들에게 더 많은 이민자들을 끌어 모으기 위한 일종의 홍보 수단으로 여겨지는 면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상앙은 얕은 수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하지는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힘든 일은 하지 않으면서도 더 많은 이익을 얻기를 원한다. 그 시절이라도 다르지 않아서, 진나라 사람들 역시 3D업종인 농사와 전투를 싫어했다. 그렇다면 힘든 일을 하는 사람이 더 많은 몫을 차지하도록 법을 바꾸면 되지 않을까? 상앙은 이른바 변법(變法)을 만들어 '일하는 사람이 대접받는 사회'를 이루려고 했다.

먼저, 그는 군공(軍功)포상제를 실시했다. 이제 모든 작위는 전쟁에서의 공로로만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출세하려면 전쟁터에서 열심히 싸울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생산량이 많은 사람에게는 세금을 줄여 주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저서인 <상군서(商君書), 상앙의 저서로 알려져 있으나 상앙 이후의 사실까지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후대인에 의해 편집된 것으로 추정됨>에서  "생산력에 따라 관직을 살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했다. 이와 더불어 군공작(軍功爵, 전투에서 세운 공적에 따라 작금을 내림)을 바탕으로 한 20등작제를 실시하여 귀족들의 권한을 축소했다. 그리하여 전쟁에서 공을 세운 귀족에게는 작급을 주고 나머지에게는 녹봉만 지급하도록 했다. 귀족이라도 별 성과를 못 내면 대접받을 수 없게 한 것이다.

춘추 전국 시대의 농업 생산력은 지금과 비교해 보면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씨앗을 한 가마니나 뿌려도 수확하는 양은 세 가마니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놀고먹는 귀족이 많다면 그만큼 백성은 힘들어지고 국력은 약해질 수 밖에 없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마라."는 구호를 연상시킬 정도로 강력했던 상앙의 변법은 노동력을 키우기 위한 극약처방이었던 셈이다.

나아가 상앙은 "어진 사람이 다른 이들에게 그 마음을 베풀 수는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어질게 만들지는 못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상과 격려의 효과는 장담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벌은 그 즉시 효력을 발휘한다. 아직까지도 많은 교육자들이 체벌의 매력에 유혹을 느낄 정도로 벌의 효과는 즉각적이다. 따라서 상앙은 "벌과 상의 비율을 9:1 정도로 하라."라고 조언했다. 심지어 어떤 대목에서는 상은 백성들이 서로를 잘 감시할 수 있을 때만 주면 된다는 극언도 서슴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그는 다섯 가구, 열 가구 정도로 마을을 묶어 연대 책임을 물었다. 한 사람만 잘못해도 그 마을 전체가 처벌받도록 한 것이다. 상앙은 전쟁터에서도 다섯 명, 열 명 단위로 병사들을 묶어 깃발을 들게 했다. 그중 한 사람이라도 비겁한 짓을 하면 전체를 처벌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서로의 잘못을 감시할 수밖에 없다. 국가가 통제하고, 개인은 서로 감시하는 사회. 상앙은 진나라를 이처럼 형벌의 공포로 꽁꽁 묶어 놓았다.

 

화려한 성장과 비참한 몰락

기원전 221년, 진나라는 마침내 중국 대륙을 통일했다. 나라 간의 경쟁은 또한 난세를 잠재울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는 수많은 사상가들 간의 싸움이기도 했다. 따라서 진의 승리는 곧 법가의 승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법가 사상가들의 말년은 거의 좋지 못했다. 상앙은 그를 밀어주던 개혁 군주 효공이 사망하자마자 바로 죽임을 당하고, 한비는 그를 견재하던 재상 이사(李斯,?~기원전 208)의 모함에 걸려 옥에서 죽고 말았다. 법가를 채택한 나라의 운명도 마찬가지였다. 진나라는 채 20년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고, 오기라는 걸출한 법가 사상가 덕택에 위세를 떨치던 위나라 또한 오기가 죽자마자 탐욕스러운 귀족들에 의해 순식간에 몰락하고 말았다.

법가 사상을 채택했던 나라와 또 이를 추종했던 사람들은 왜 그리 하나같이 몰락의 길을 걸었을까? 그 이유는 '개발독재의 한계'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철권(쇠뭉치와 같은 굳센 주먹이란 뜻) 통치로 국민을 하나로 묶는 방식은 후진국에서는 효과적일 수 있다. 배고픈을 이기고 잘 살아보자는 욕망이 무엇보다도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파르타식 학원에서 공부하여 성적을 많이 올렸다 해도, 평생을 그곳에서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치 제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느 정도 풍요로워지면, '인간다운 삶'에 눈뜨기 시작한다. 자유롭고 질 높은 삶을 바라게 마련이라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더 이상 국가의 일방적인 강요, 검소한 내핍의 강조는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같이 '개발독재'국가들은 경제가 어느정도 경지에 오른 뒤에는 몰락의 길을 걷곤 했다. 물론 독재자들은 파멸을 막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적의 위협을 과장하고 검약의 미덕을 강조하는 것은 독재자들이 흔히 쓰던 수법이다.

아방궁과 진시황릉으로 대표되는 진나라 시황제의 어마어마한 사치 뒷면에는 시중에 유통되는 물자를 줄여서 문화가 자라나지 못하게 하려는 법가의 피나는 노력이 숨어 있었다. 여유가 생겨 문화가 꽃피고, 그 결과 백성들의 요구가 다양해지고 생각이 많아지면 그만큼 통치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반항심이 싹트지 못하도록 늘 '적과 대치한 개발도상국의 상태'로 유지하려고 노력했다는 의미다.

개발 독재는 아무리 경제 발전에 기여한다 해도 '독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거부감이 클뿐더러 결국에는 스스로의 모순 때문에 쇠락의 길을 걷고 만다. 지금도 우리 사회에는 개발독재 시절에 대한 향수를 지난 사람이 여전히 많다. 공을 무시해서는 안되지만 그 한계를 놓쳐서도 안된다. 상앙과 한비의 나라인 진나라의 화려한 성장과 비참한 몰락은 우리에게 뼈아픈 가르침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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