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5. 7. 22:44ㆍ역사
전쟁과 함께 시작된 위대한 철학
인류 문명은 전쟁을 거치면서 발전했다. 비행기와 자동차가 일반화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때 군사용으로 널리 쓰이고 나서부터이며, 인터넷도 원래는 미국 국방성의 연락 체계로 개발된 것이었다. 이보다 훨씬 이전에도 큰 전쟁이 한번 일어나면 획기적인 발명품들이 속속 탄생했다. 전쟁은 죽느냐 사느냐 게임이다. 사람들은 그야말로 '목숨 걸고' 살 방도를 찾게 마련이고, 그 가운데서 평화로울 때는 꿈도 못 꿨던 엄청난 발전이 이루어지곤 했다.
이 점은 철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위대한 사상은 보통 혼란한 시기에 생겨났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활발하게 철학 논의가 이루어졌던 시대는 대륙 전체가 갈라져 싸웠던 춘추 전국 시대다. 이 혼란기에 유가. 법가. 묵가. 도가 등 수많은 학파가 생겨나 목소리를 높였다. 이른바 백가쟁명 시대였던 것이다.
이들이 주장했던 것은 결국 전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었다. 생존을 건 싸움의 해법이니만큼 절실하고 치밀할 수 밖에 없었다. 어찌나 삶의 정곡을 정확히 찌르며 정교한 논변을 폈던지. 이 시대에 생겨난 학파들은 지금까지도 동양 문명을 지탱하는 사상의 기초가 되고 있을 정도다. 유교가 우리 사회의 바탕을 이루는 문화로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있듯이 말이다.
최고의 선은 흐르는 물과 같다
우리가 살펴볼 노자 사상도 이 시대에 뿌리내린 철학이다. 백가쟁명시대에 탄생한 사상 가운데 중국 역사상 가장 영향력이 컸던 사상이라면 공자가 창시한 유교와 노자에서 비롯된 도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둘의 성격은 라이벌이라 할 만큼 다르다.
유가는 원래부터 지배층의 사상이었다. 지금도 유학자라 하면 우리는 흔히 대궐 같은 집에서 팔자걸음을 걷는 선비를 떠올린다. 반면, 도가는 민중의 사상이라 할 만하다. 도교(道敎)로 세속화된 도가의 사상은 지금은 우리 생활 속에서 뒷골목에 자리 잡고 있는 점(占) 집 문화로 남아 있다.
하지만 원래 노가 사상은 지극히 '자연 친화적'이었다. 전통 농경 사회를 떠올려 보자. 자신이 태어난 마을에서 살다가 죽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던 그 시절만 해도, 동리 사람들 모두가 친척이거나 오랫동안 알고 지내는 이웃이라 법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다. 사람들 사이의 문제는 조상 대대로 해 왔던 것처럼 '도리'에 맞게 조정하고 해결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특별한 사건이 없는 한, 사람들의 생활은 봄이 되면 씨 뿌리고 여름이 오면 김을 매고 가을이면 거두는 식으로 자연에 따라 물 흐르듯 흘러갔다.
노자 철학의 핵심인 '도(道)'도 이런 자연스러운 생활 방식과 다르지 않다. 도는 곧 자연의 길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새는 하늘을 날고 물고기는 바다를 헤엄치듯이 자연은 가만히 놔두면 원래 주어진 길을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다.
이는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다. 억지로 자연을 거스르려 하지 않고 순리대로 산다면 모든 일이 순조로울 수 밖에 없다.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 욕심부리지 않고 이웃과 오순도순 산다면, 삶은 우주가 그렇듯 조화롭게 흘러갈 것이다. 덕(德)이 있는 사람이란 이렇듯 자연의 길, 곧 도에 따라 사는 사람을 말한다. '최고의 선은 흐르는 물과 같고......... 억지로 하지 말고 흘러가듯 살라.'는 노자의 가르침은 태고(太古)의 평화로웠던 시골 마을의 정서를 그대로 담고 있다.
그러나 혼란한 시대는 평온한 마을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다른나라와 싸우려면 군사와 물자가 필요한 법, 국가는 시골 마을의 젊은이들을 잡아가고 세금을 거두기 시작했다. '보호'해 준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 그들은 깡패에 지나지 않았다. 국가 자체가 없었다면 애초에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국가는 군사 요지라는 이유로 개인의 땅을 빼앗아 사람들을 억지로 끌어다가 요새를 만들었다. 행복한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척박한 땅에서 기구한 삶을 살아야 했던 이들을 떠올린다면, 무위자연의 가르침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갔을지 느끼고도 남을 일이다.
노자가 '나라는 작고 백성은 적은 소국(小國)상태를 가장 이상적인 세상의 모습이라도 본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노자가 살았던 것으로 추측되는 주나라 시기의 마을이란(里) '폭과 넓이가 300걸음 정도에 스물다섯 남짓의 가구가 모여 사는 곳'을 말했다. 노자가 말하는 '국(國)'은 이런 자연 취락을 의미했던 것이다.
은둔의 철학에서 통치의 철학으로
재미있는 점은 노자의 철학이 농민뿐 아니라 그 당시 지배층에게도 설득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1973년, 중국 후난성 창사에서는 '마왕두이'라는 무덤이 발굴되었다. 무덤의 주인은 한나라 초기의 대후(大候)로, 지금으로 치면 도지사 정도 되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비단에 적힌 노자의 <도덕경>이 함께 발견되었다. 우리는 이를 통해 도지사의 무덤에 같이 묻힐 정도로 노자의 가르침이 그 당시 지도층에게도 호소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도덕경>은 <도경>과 <덕경>의 순서로 되어 있는 지금의 판본과 달리, <덕경><도경>의 차례로 되어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도와 덕'의 순서라면 자연의 도를 알아서 덕스러운 사람이 된다는 의미지만, '덕과 도'의 차례라면 덕스러운 사람(지배자)이 자연의 도를 이룬다는 뜻이 된다. 한마디로 <도덕경>은 그 당시 지배층들에게 정치 실천 가이드처럼 여겨졌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도덕경>내용의 상당수는 통치술과 군사학에 관한 것이다. 백서본이 발견되기 전까지 학자들은 이 내용들이 군사 서적에서 잘못 흘러 들어왔을 것이라 추측하곤 했다.
그런데 이 책은 그 당시 지배층뿐 아니라 지금의 정치가들에게도 많은 가르침을 준다. 그 속에 담겨 있는 노자의 정치 철학은 지금 보아도 신선하게 느껴질 정도다. 노자의 말을 직접 들어 보자.
가장 좋은 것은 백성들이 통치자가 있다는 사실만을 아는 것이고, 그 다음은 통치자를 가깝게 여기는 것이고, 그 다음은 통치자를 두려워 하는 것이다. ........ (통치자는)공을 세우고 일을 이루지만 백성들은 모두 자신이 한 일이라 말한다.
잘 사는 나라일수록 국민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다. 태평성대였다는 요순시대에도 그랬다. 그 당시 사람들은 임금이 누군지조차 몰랐다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노자도 정치가들에게 백성들이 통치자가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다스리라고 충고한다. '억지로 하지 않는다.'는 무위자연의 가르침은 이런 식의 통치 철학으로 거듭난다. 입만 열면 나라가 시끄러워지는 지금의 우리 정치가들을 보면, 노자의 가르침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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