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5. 6. 12:36ㆍ역사
철학하는 의사
니체는 스스로를 '철학하는 의사'라고 부르곤 했다. 확실히 니체의 철학에는 선입견을 부수고 삶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힘이 있다. 나치 정권이 제1차 세계대전 후 열패감에 젖은 독일 국민에게 니체를 '정신적 영양제'로 주입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니체의 철학은 유럽의 3등 시민에 지나지 않았던 독일인들을 순식간에 '제3제국을 이끄는 위대한 아리안 족의 후예"로 거듭나게 할 만큼 강렬한 자극제였다. 그렇다면 니체는 무기력에 빠진 우리 소시민에게도 삶의 열망을 일깨워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니체를 통해 '구원'을 얻은 사람들은 누구인가? 바로 거리에 즐비한 '낙타형 인간'들이다. 낙타는 불평을 모른다. 주어진 먹이를 먹고 가라는 길을 갈 뿐이다. 이 동물은 '삶은 고난'이라고 여기며 지난한 생활에 탈출구란 없다고 믿는다. 남이 하는 말에 전전긍긍하고 자기 머리로 무엇이 가치 있고 올바른지 생각하기보다는 자기보다 우월한 자의 말에 맹목적으로 순종한다. 반면, '사자형 인간'들도 있다. 이들은 여느 낙타들과는 다르다. 이들은 "아니다(Nein)!"라고 말할 줄 안다. 순종을 강요하는 권위에 맞서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릴 줄도 안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은 '반항'일뿐 '자립'은 아니다. 무엇을 이루기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현실이 참담하기에 거부할 뿐이다. 대안은 늘 없거나 비현실적이다. 사자들은 결국 독기를 잃고 개처럼 쇠사슬에 묶여 동물원에 끌려갈 신세다. 세상이 부조리하여 혁명을 꿈꾸지만 정작 이루어야 할 이상이 사라진 인간, 이들이 바로 니체가 측은해하는 사자들이다.
니체는 낙타와 사자들을 어떻게 치유할까? 그는 먼저 신(神)부터 죽인다. 그가 죽인 신이란 무엇인가? 바로 끊임없이 무엇인가에 의지하고 싶어하는 우리의 심약함이다.
'낙타'집단이 갖고 있는 콤플렉스와 우울은 이렇듯 스스로 서지 못하고 절대적인 권위에 인정받음으로써 삶의 안정을 찾으려는 나약한 마음에서 비롯된 탓이 크다.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그래서 "신은 죽었다"라고 군중에게 선포한다. 무기력과 나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자기를 사랑하고 현실을 긍정하라! 니체가 낙타들에게 던지는 첫 번째 충고다.
반면, 사자들을 향해서는 또 다른 처방전을 내민다. 인상 쓰고 있는 사자들에게 니체는 "웃으라!"고 명령한다. 사자는 결코 웃고 있는 어린아이를 이길 수 없다. 무슨 말일까? 사자는 자신을 위협하는 대상을 쓰러뜨릴 수는 있다. 그러나 그 후에 찾아오는 것은 끝 모를 허탈과 사라지지 않는 분노뿐이다.
창조자는 어린아이처럼 웃고 있어야 한다. 무력감과 냉소는 중력처럼 우리를 끝없이 밑으로 끌어내린다. 그런 어린아이의 놀이는 '무엇을 이루기 위해' 향해 가는 과정이 아니다. 그 자체로 즐거운 행위일 뿐이다. 웃음은 또한 절대적인 권위를 무너뜨린다. 위세를 떨치던 백인 우월주의 단체 KKK단이 약화된 이유는 엄청난 공권력 때문이 아니락, 그들의 비밀 교리가 슈퍼맨 만화를 통해 철저하게 희화되어 대중의 웃음거리가 된 탓이 크다.
니체는 말한다."용기는 최상의 살해자다. 특히 공격적인 용기는!" 무력감과 패배의식은 우리의 삶을 끊임없이 밑으로 끌어내린다. 그때마다 니체는 '달려들어 물어뜯을 것'을 우리에게 권한다.
타인과 사회가 맞추어 놓은 틀에 무작정 순응하며 사는 삶은 아무리 인정받아도 결국에는 박수 치는 부모 없이는 스스로 만족할 수 없는 유치원생의 모습과 같다. 자신을 사랑하고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으며 '나만의 나'를 만들어 갈 때, 비로소 나는 낙타에서 사자로, 다시 초인(Ubermensch)으로 거듭날 수 있다. 자유는 두려움을 극복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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