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8. 11. 11:49ㆍ역사
제1편
나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법률을 있을 수 있는 형태로 파악할 경우에, 사회질서 속에 어떤 정당하고도 확고한 정치의 원칙이 있을 수 있는가를 연구하고자 한다. 나는 이 연구에서 정의와 이익이 결코 분리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법률이 인정하는 바와 이익이 규정하는 바를 항상 결합시키도록 노력할 생각이다.
나는 내 주제의 중요성을 증명하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내가 정치에 대하여 논한다고 해서, 나더러 군주인가 아니면 입법자인가 하고 물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어느 쪽도 아니며, 아울러 그렇기 때문에 정치에 대하여 논한다고 대답하고 싶다.
만약 내가 군주나 입법자라면 당연히 실행해야 할 일을 말로 하는데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을 실행해 버리거나 아니면 차라리 침묵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자유로운 국가의 시민으로 태어나 주권자의 일원인 나의 발언이 정치에 미치는 영향력이 아무리 미약할지라도, 투표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게는 정치를 연구할 의무가 충분히 지워져 있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여러 정부를 연구할 때마다, 내가 내 나라의 정부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들을 그 연구 과정 속에서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제1편의 주제
최초의 사회에 대하여
모든 사회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일하게 자연적인 것은 가족이라는 사회이다. 게다가 가족에게서조차 자식들은 자기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아버지를 필요로 하고, 필요로 하는 동안 아버지와 결합되어 있다. 이 필요성이 없어지면 자연적 유대는 곧 끊어지고 만다. 자식들은 아버지에 대한 복종의 의무에서 벗어나고, 아버지는 자식들에 대한 양육의 의무에서 벗어나 모두가 동등한 자격으로 독립하게 된다. 만약 이들의 계속 결합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결합은 더 이상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의지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가족이라는 사회도 결국은 약속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것이다. 쌍방에 공통된 이 자유는 인간 본성의 결과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제일가는 법칙은 자기 자신에 대한 배려이다. 그리하여 인간이 이성을 가질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자기 자신만이 자기 보존에 적합한 수단을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자가 되며, 따라서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족은, 말하자면 정치사회의 최초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지배자는 아버지에 해당하고 인민은 자식들에 해당한다. 또 모두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고 자유롭기 때문에 그들이 자유를 양도하고 있는 것도 오직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에 불과하다. 다만 가족과 국가의 차이는, 가족에 있어서는 자식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아버지가 자식들을 양육하는 것이지만, 국가에 있어서는 지배자가 인민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지배의 희열 때문에 인민을 지배한다는 점이다.
그로티우스는 인간의 모든 권력이 피지배자를 위하여 확보되어 있다는 주장을 부정하면서 노예제도를 그 예로 들었다. 그가 계속 사용한 추리 방법은 항상 사실에 따라 권리를 확립하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보다 더 논리적인 방법을 쓸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폭들에게 가장 유리하게 되어 버린다.
그로티우스에 따르면, 전 인류가 백 명 정도의 인간에게 예속되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백 명 정도의 인간이 전인류에게 예속되어 있는지가 의심스럽게 된다. 그의 저작들을 통해서 본다면 첫 번째 견해에 기울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홉스의 견해이기도 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인류는 많은 가축의 무리로 나누어지고 각 무리마다 주인이 있으며 그 주인은 자기 무리를 잡아먹기 위해 지켜주고 있다는 것이 된다.
목자가 자기들의 가축들보다 우월한 본성을 타고났듯이, 인간의 목자인 군주들도 그들의 인민들보다 우월한 본성을 타고났다는 것이다. 필론의 보고에 따르면 로마 황제 칼리굴라도 이와 같이 추론하고 이 이론에 따라 왕은 신이라든지 아니면 인민이 짐승이라는 교묘한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칼리굴라의 이러한 추론은 홉스와 그로티우스의 추론과 일치하고 있다. 이들보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도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노예가 되기 위하여 또 어떤 사람들은 지배자가 되기 위하여 태어났다고 말한 바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주장은 옳다. 그러나 그는 결과를 원인으로 착각한 것이다. 노예의 신분으로 태어난 인간의 노예가 되기 위하여 세상에 태어났다는 말만큼 확실한 말은 없다.
노예들은 그들의 구속 안에서 모든 것, 심지어 그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욕망마저 잃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노예들은, 율리시즈의 친구들이 그들의 짐승과 같은 상태를 좋아했던 것처럼, 자기들의 노예상태를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태어날 때부터의 노예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이전에 이미 본성에 반하여 노예가 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폭력이 최초의 노예들을 만들어 내었고, 노예들의 비겁 성이 그들의 노예상태를 영원히 유지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아담 왕이나 노아 황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한 바 없다. 노아 황제는 세 사람의 위대한 군주의 아버지였으며, 이 세 군주가 사투르누스의 자식들처럼 세계를 분할했으므로 양자를 동일한 인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이 점에 대하여 신중한 태도를 취한 것은 사람들의 감사를 받을만하다고 믿는다. 나는 이들 군주의 직계 아니면 그 집안의 종손이 될지도 모르므로, 자격 심사를 한다면 내가 인류의 정당한 왕이 될는지 누가 알겠는가? 어쨌든 아담이 세계의 유일한 주민이었던 동안만은, 로빈슨 크루소가 그의 섬의 주권자였듯이, 그가 세계의 주권 자였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이러한 제국의 장점은, 왕좌에 안전하게 앉은 군주가 반란, 전쟁, 음모 등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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