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5. 4. 11:34ㆍ역사
과학의 시녀가 된 철학
철학의 문제는 시대의 고민에 따라 달라지곤 한다. 교회가 지배하던 중세 유럽의 철학자들은 신의 존재를 놓고 심각한 논쟁을 벌이곤 했다. 이성이 트이기 시작한 서양 근세에는 어떻게 해야 오류 없는 지식을 얻을 수 있는지가 철학자들의 주된 고민이었다. 갈릴레이의 지동설에서 볼 수 있듯, 새로운 사실이 발견될수록 기독교 성경과 과학은 끊임없이 충돌했기 때문이다. 과연 어느 쪽이 더 나은 지식인지, 이 둘을 조화시킬 방법은 없는지가 철학자의 주된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19세기가 접어들자 과학의 승리를 분명해졌다. 이제 신앙이나 관습은 더 이상 과학 지식보다 우월할 수 없었다. 과학적 접근과 해결은 가장 논리적이고 올바른 방법으로 여겨졌다. 세상은 과학 기술을 등에 업고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었고, 이제 철학자들에게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바꾸는 일만 남은 듯했다.
논리 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태어났다. 논리나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종교나 도덕은 이제 불완전한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 알 길이 없는 신의 뜻이나 윤리를 과학같이 분명하게 만들 수 있다면 세상은 한층 더 멋있는 곳이 될 터이다. 교회 신부들이 곧 철학자였던 서양 중세에 철학은 '종교를 위한 시녀'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과학의 시대에 철학은'과학을 위한 시녀'로 거듭나야 했다.
왈츠와 정신 분석과 이성의 도시
논리 실증주의 고향은 '빈학파'가 태어난 오스트리아라고 할 수 있다. 빈은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였다.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반까지의 빈은 소크라테스 시절의 아테네와 여러모로 닮아 보인다. 소크라테스가 활동하던 때의 아테네는 문화와 철학이 가장 왕성하게 꽃피었던 시기다. 극장에서는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Euripides, 기원전 484?~기원전 406?)등의 작품이 공연되었고, 소피스트라고 불리는 지성인들은 아테네로 끊임없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문화 절정기의 아테네는 사실 정치적,경제적으로는 몰락의 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맛본 오만한 아테네에 대해,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더 이상 인내심을 보이려 하지 않는다. 예술의 토양이 되는 진한 감정과 깊은 사색은 삶의 고뇌에서 생겨나는 법이다. 그 시기 아테네의 예술과 철학의 찬란함은 사실 신산스러운 삶의 반증이기도 했다.
19세기 말엽의 빈도 다르지 않았다. 빈은 요한 슈트라우스(Johann Strauss, 1825~1899)의 왈츠의 고향이었고, 거리의 카페는 아돌프 로스(Adolf Loos, 1870~1933) 같은 건축가에서 트로츠키(Leon Trotsky, 1879~1940) 같은 혁명가에 이르기까지 그 시대의 대표적인 지성인들로 늘 붐볐다. 그뿐 아니라, 빈은 의학의 중심지였으며 정신 분석의 창시자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가 활동하던 곳이기도 했다.
반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명백히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프란츠 요제프(Franz Joseph I ,1830~1916) 황제가 스스로 "제국의 유일한 목표는 현상 유지일 뿐"이라고 밝힐 정도로 나라에는 희망이 없었다. 사실 발달한 카페 문화는 열악한 주거 환경에 힘입은 바 크다. 사람들이 구질구질한 집구석을 피해 카페로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정신분석이 이 도시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그만큼 시민들의 심리적 불안이 컸다는 반증도 된다. 슈트라우스의 대표적인 왈츠인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은 제국의 군대가 자도바 라는 마을에서 프로이센 군대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한 지 몇 주 뒤에 작곡되었다고 한다. 이 패배는 제국의 운명을 결정지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흥겨운 왈츠 뒷면에는 위안받고 싶어 하는 불안한 시민들이 있었다. 명료한 이성은 혼란한 시대일수록 더욱 빛을 발한다. 그런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분명하고 명쾌한 진단과 해법을 바라기 때문이다. 논리 실증주의는 이런 시대 배경 속에서 태어났다.
목요 철학 세미나
'학파'라는 말이 붙으면 왠지 거창하게 들리지만, 사실 빈학파의 실체는 학술 친목 단체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모리츠 슐리크(Moritz Schlick 1882~1936) 교수는 1992년 빈 대학에 온 이후로, 목요일 저녁마다 대학 건물 1층에 있는 지저분한 강의실 하나를 빌려 토론 모임을 열었다. 참석자는 보통 스무 명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모임에는 철학자뿐 아니라 경제학자, 수학자, 과학자들도 많이 참석했다. 오토 노이라트, 루돌프 카르납, 후에 불완전성의 정리로 유명해진 괴델 등이 모임의 주된 멤버였다. 때로 이들은 해외 학자들을 초청해 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슐리크는 수완이 좋은 사람이어서, 윌러드 콰인, 카를 헴펠, 앨프리드 에이어 등 당대 유명한 철학자들도 이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
모임은 서로 관심사가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야 오래 가게 마련이다. 후에 '빈학파"라고 불리게 되는 모임 참석자들은 대부분 철학은 과학을 통해 더욱 엄밀해지고 내용이 풍부해 질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은 절대정신, 정의, 선의지 등 추상적이고 모호한 언어로 넘쳐 나던 당시 학문을 철학의 명료함으로 다듬으려고 했다.
그들의 주장은 '검증 가능성(the principle of verification' 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모든 문장을 검증할 수 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 예컨대, "물은 100도에서 끓는다.", "곰팡이는 돌덩어리다."와 같은 문장은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다. "2+3=5"와 같은 수식도 마찬가지다. 논리 관계를 따져 보면 옳은지 그른지가 분명하다. 그러나 "신은 죽었다.", "역사는 절대정신의 자기실현 과정이다."와 같은 말은 아무리 노력해도 참인지 거짓인지 검증할 수 없다. 이런 문장 들은 '잠꼬대와 같이 무의미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검증할 수 없는 말들은 학문의 영역에서 모두 버려져야 한다.
"피카소는 고흐보다 뛰어나다."와 같이 미(美)에 관련된 문장도 마찬가지다. 이는 개인의 취향일 뿐 검증할 수 있는 문장이 아니다. "항상 정직해야 한다."는 문장 또한 마찬가지다. 예술과 윤리의 세계는 증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사이비 명제들(preudo propositions)'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언어의 엄밀한 사용을 통해 편견과 오해를 없애고 세상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개혁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일상에서 쓰는 말들은 애매모호하여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분명하게 검증 할 수 있는 말들로 이루어진 인공 언어(artificial language)를 만들어 쓸 수 있다면 세상은 더욱 완벽해질 터이다. 화려한 문화가 비참한 경제와 정치 현실을 가리고 있던 당시 빈의 상황에서, 어떠한 편견도 기대도 없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는 논리 실증 주의자들의 명료함은 문제를 풀어 가는 첫 단추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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