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5. 3. 19:25ㆍ역사
실학자 정약용
원래 성리한은 현실적인 학문이었다. 고려 말, 성리학을 이땅에 '수입'한 안향(安珦,1243~1306)은 이렇게 말한다.
".......성인의 도(道)는 일용(日用:날마다 현실에 적용하는) 논리일 뿐이다. 저 불교신자들은 부모를 버리고 가정을 떠나서 인간 윤리를 없애고 도의를 저버리니 오랑캐의 한 종류다."
고려는 불교의 나라였다. 불교는 현실을 버리고 깨달음을 좇으라고 이른다. 반면, 공자의 유교는 현실을 잘 가꾸라고 가르친다. 예법은 그 자체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무릇 학문이란 "현실에 통해야 하며 유용해야 한다.
실학(實學)은 이런 유학의 본래 가르침에 충실하려는 움직이었다. 실학은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말에서 왔다. '사실에 바탕을 두고 진리를 탐구한다.'는 뜻이다. 이는 원래 청나라 때 고증학(考證學)의 모토(motto)였다. 고증학자들은 구체적인 증거를 따져서 공자, 맹자 같은 성현들이 진짜 한 말을 찾아 그들의 본래 마음을 새기려 했다. 뜬구름 잡는 소리들과 쓸데없이 복잡한 온갖 논쟁을 잠재우기 위해서였다.
조선의 실학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역사학자 최인한에 따르면, 우리의 실학은 경세(經世)를 위한 학문이다. 살림살이를 나아지게 하는 학문이라는 뜻이다. 실학을 따르는 이들은 학문의 가치, 정치의 성패는 백성들의 삶이 나아졌는지에 따라 갈려야 한다고 믿었다. 유형원, 이익, 홍대용, 박지원, 정약용 같은 학자들은 우리나라 실학의 대표격이다.
이 가운데서도 다산(茶山)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단연 눈에 띈다. 그는 500여권 넘게 책을 썼다. 철학, 문학에서 지리, 역사, 의학에 이르기까지, 그의 관심사는 끝이 없었다. 다산을 '실학을 집대성한 사람'으로 꼽은 이유다.
게다가 다산은 철저히 '현장 중심'이었다. 36세 때 그는, 황해도 곡산(谷山)의 부사가 된다. 민란(民亂)이 끊이지 않던 곡산은 관료들의 기피지역이었다. 다산이 부임해 올 때, 한 사람이 그 앞에서 탄원서를 던진다. 그는 민중요소를 이끌었다는 이유로 '현상수배'된 인물이었다. 관리들은 그를 체포하려 했다.
그러나 다산은 쿨하게 그를 풀어준다. "관리들이 민생에 밝지 못한 까닭은 백성들과 대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같이 형벌을 겁내지 않고 관료와 논쟁하려는 이들은 무척 소중한 존재다. 나는 그대를 천금을 주고 사려한다."
다산은 소통의 중요성을 절절하게 깨닫고 있었다. 또한, 그의 펼친 행정은 단순명료했다. 그는 널리 퍼진 비리를 '행정 절차 간소화'로 바로 잡았다. 그는세금으로 내던 베를 재는 잣대부터 통일 시켰다. 여러 번 내던 자잘한 세금도 하나로 합쳐버렸다. 서류도 단순하게 했다. 그는 호구조사 양식인 "가좌표(家坐表)"를 새로 만들었다. 식솔 수에서 재산 수준, 직업까지 한 눈에 들어오게끔 말이다. 서류가 단순 명확해지니, 비리도 스러졌다. 그는 불과 2년 만에 곡산의 생활 수준을 '집집마다 송아지 한 마리씩을 새로 들여놓을 만큼'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실학자는 유학자이기도 하다. 다산도 다르지 않았다. 유학자들의 근본은 수기치인(修己治人)에 있다. 자신을 잘 닦아 사람들을 훌륭하게 이끈다는 뜻이다. 그는 "진정한 선비란 도(道)를 익혀, 위로는 임금을 섬기면서 아래로는 백성에게 혜택을 가게 하는 사람" 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백성들을 끊임없이 도덕적으로 올곧게끔 교화(敎化)하려 했다.
책으로 모든 것을 배운 사람들은 터무니없는 원칙만 고집한다. 그러느라 현실을 어그러뜨리기 일쑤다. 그러나 현실과 이론을 함께 바라보는 사람은 원칙으로 현실을 살찌운다. 다산이 보여준 실학자의 태도가 바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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