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5. 2. 08:00ㆍ역사
철학이 국가를 만든다
명문 집안에는 무시할 수 없는 나름의 가풍(家風)이 있다. 올곧은 어른이 계시고 윤리가 바로 서 있는 집안을 어떤 풍파에도 위엄과 기품을 잃지 않는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역사상 강대했던 제국들은 대개 뚜렷한 도덕적 기준과 목표를 지니고 있었다. 중국 대륙에 중화(中華)문명의 뿌리를 내린 한(漢) 제국에는 유교라는 굳건한 국가 철학이 있었고, 무려 500년이라는 세월을 버틴 조선 왕조에는 성리학(性理學)이라는 윤리 질서가 있었다.
그 어떤 나라 보다도 튼튼하고 견실했던 로마 제국은 무려 15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지금의 유럽과 북아프리카, 중동 지역 전체를 통치했다. 하지만 로마도 처음에는 "지성에서는 그리스 인보다도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인이나 게르만인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 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 인보다 뒤떨어지는", 이탈리아의 조그만 도시 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로마가 세계사에 길이 남을 대제국으로 클 수 있었을까? 가장 큰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로마의 강인한 국가 정신에 있지 않을까 한다. 이번에 살펴볼 스토아(Stoa) 철학은 바로 로마가 가장 강성했던 시기에 '국가 철학' 이다시피 했던 사상이다.
미국과 로마는 쌍둥이
로마 제국은 여러 면에서 지금의 미국과 비슷한 구석이 많다. 첫째, 두 나라는 모두 여러 인종과 문화가 섞여 있는 다민족 국가다. 둘째, 강력한 군사력으로 세계를 재패했다. 미국이 제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일류 국가로 발돋움했듯, 로마 또한 끊임없는 전쟁으로 '성장 동력'을 얻었다. 셋째, 이 둘은 최고의 강대국임에도 문화적 열등감이 심한 편이다. 미국인들은 '맥도널드'로 상징되는 자기네 나라의 문화를 유럽에 비하면 한참 떨어지는 '저질'로 여기곤 한다. 이 점은 로마도 마찬가지여서 아무리 힘이 세다 해도 고귀한 정신 앞에서는 주눅이 들 수밖에 없는지, 그리스를 정복하고서도 문화적으로는 그리스에 대한 열등감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그뿐 아니라 현대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영국식 표준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교양인으로 여겨지듯, 로마 인들도 상류 사회에서는 그리스 어를 써야 대접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들 두 나라의 '국가 철학'도 원래 자신들의 것이 아니었다. 미국 혼(魂)의 뿌리가 유럽에서 시작된 청교도 정신(puritanism)이듯이, 로마의 정신인 스토아 철학도 원래는 그리스 철학이었다. 더 재미있는 것은 부와 힘의 상징이다시피 한 두 강대국의 국가 철학이 모두 소외된 자들을 위한 사상이었다는 점이다.
아파테이아, 스토아 철학의 꿈
청교도 정신이 영국이 주류 교회에 반기를 들었던 아웃사이더의 철학이었듯, 스토아 철학도 몰락한 그리스의 암울한 분위기를 달래던 극히 개인적인 철학에 지나지 않았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요즘으로 치자면 우울증 환자를 상담하는 정신과 의사 같은 분위기가 풍긴다.
스토아 철학에 따르면, 이 세상 일은 '숙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세상만사는 이미 '우주의 섭리(Logos)'에 따라 정해져 있어서 어쩔 수 없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로지 내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세상사에 맞서 마음을 다잡는 것뿐이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해 보자. 너무 슬퍼 죽을 것 같은 이에게 스토아 철학자들은 조용히 충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네 뜻과는 상관없이 대자연의 법칙에 따라 이미 정해졌던 일이다. 그러니 슬퍼하지 마라. 네가 진정 이러한 신의 섭리, 곧 대자연의 순리를 깨우쳐 안다면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담대한 행복에 이를 수 있다. 이것이 이른바 아파테이아(apatheia, 부동심)의 경지다.
언뜻 보기에도 이런 유(類)의 철학은 사업이나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 안되고 꼬이기만 하는 이들에게는 위안이 될지언정, 승자의 논리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스토아 사상이 묘하게 '군인 정신'과 맞닿는 부분이 있다는데서 찾을 수 있다.
로마 군단은 개인의 용맹보다는 짜임새 있는 군진(軍陳)과 규율로 승부를 내던 군대였다. 여러분이 로마의 병사인데 눈앞에 엄청나게 덩치 큰 게르만 야만족들이 무더기로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고 있다고 상상 해 보라. 당장 등 돌려 도망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스토아 철학은 말한다. "냉철하라. 이미 삶과 죽음은 신의 섭리로 정해져 있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헛된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너의 앞에 놓인 임무를 충실히 하는 것뿐이다." 정말 군인에게 어울리는 철학이 아닌가?
앞서 말했듯 로마는 전쟁을 통해서 국력을 키워 나간 나라다. 잘나가던 시절, 로마 지도층의 정서는 제 목숨보다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군인 정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네카(Lucius A. Seneca, 기원전 4?~65) 같은 철학자는 네로(Nero, 37~68) 황제에게 버림받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문은 항상 열려 있다. 그러니 무엇이 두렵겠는가?라고 외치며 언제든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다고 여긴 로마 인들은, 더 이상 가망이 없으면 자결하는 것을 최고의 명예로 알았다. 우주의 섭리가 그렇다면 이제 자신의 의지로 마땅히 따라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들은 "극장의 좌석은 모든 사람의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특정한 사람에게 예약되어 있듯이" 자기에게 주어진 몫에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 결과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신에게 맡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렇듯 의무에 충실하면서도 결과에는 초연한 사람들이 다스리는 국가라면 어떤 고난 앞에서도 결국 승리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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