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5. 1. 14:24ㆍ역사
세상을 떠도는 '공산주의' 유령
20세기는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의 시대였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전 세계가 마르크스를 영웅으로 받드는 국가들과 '악의 화신'으로 여기는 나라들로 나뉘어 대립했으니 말이다. 냉정(cold war)이라 불린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대립은 마르크스를 따르느냐 부정하느냐를 놓고 생긴 갈등이다.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인류의 3분의 1은 마르크스 사상이 곧 '진리'였던 세상에서 살았고, 그의 가르침대로 세상을 바꾸려 노력했다. 이는 역사상 어떤 종교나 사상도 하지 못했던 엄청난 일이었다.
그러나 전 세계 인류가 관여하다시피 한 이 엄청난 '사유 실험'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1990년, 구소련의 몰락을 시작으로 마르크스를 추종하던 국가들은 하나하나 자본주의 앞에서 꼬리를 내렸다. 지금도 중국이나 쿠바 같은 나라들이 사회주의를 내세우고 있긴 하지만, 그 내면을 보면 이제는 그들에게도 돈이 최고신(最高神) 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마르크스는 여전히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사상가 가운데 한 명이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 자본주의가 맹위를 떨치면 떨칠수록 그가 지적한 자본의 문제들은 더욱더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전히 마르크스에 기대어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를 지적하고 해결책을 찾는다. 지금도 흔히 '좌파'라고 하는 사회 비판 세력의 대부분은 마르크스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점에서 1848년에 발표된 그 유명한 <공산당 선언> 첫머리에 나오는 "공산주의란 유령이....... 세상(유렵)을 배회하고 있다."는 말은 아직도 유효한 셈이다.
스크루지와 성냥팔이 소녀의 시대
마르크스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의 사상이 '공산 사회'라는 인류의 오랜 꿈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공산 사회란 차별이나 억압 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사는 세상을 말한다. 마르크스 방식대로 말하자면 '누구나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소비하는 세상'이 공산 사회다.
물로 마르크스 이전에도 이상 사회에 대한 주장을 얼마든지 있었다. 플라톤의 <국가>나 토머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의 <유토피아>도 모두 공산주의 사회라는 꿈을 담고 있는 책들이다. 그러나 이 책들은 소수의 지식인들에게 '정신적 영향'만을 끼쳤을 뿐, 마르크스의 주장처럼 전 세계를 들썩이게 만들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왜 유독 마르크스만 그토록 큰 파장을 일으켰던 것일까?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시대 탓'이 아니었을까 한다. 산업혁명은 역사상 최초로 사람들에게 '계급의식'을 불러일으켰다. 계급이랑 일종의 패거리를 말하는데, 못 사는 사람들은 그들대로, 잘 사라는 이들은 그들 나름대로 '우리는 한패'라는 동류의식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뿔뿔이 흩어져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동질감이 생기기 어렵다. 따라서 계급이라는 패거리가 생기기 위해서는 비슷한 사람들끼리 한곳에 모여 있어야 한다. 그 당시 증기 기관의 등장, 이를 이용한 대규모 모직공장의 출현은 노동자들을 한 곳으로 모으는 결과를 가져왔다. 더구나 그때는 원료인 양털은 얻기 위해 땅주인들이 농토를 목초지로 바꾸거나 농지 개량으로 농어 효율성이 높아져, 농민들이 내쫓기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도시로 흘러들어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 곧 '노동자 계급'을 형성했다.
19세기 도시 노동자들의 생활은 지옥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가혹했다. 그 당시 발표된 소설을 보면 도시를 줄곧 '하수구'에 비유하고 있는데,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정도로 상황이 열악했다. 공장에서는 매일 엄청난 유독가스를 내뿜고 있었고, 노동자들은 하루에 16시간 노동에 네 살배기 어린 자식까지 동원해도 먹고살기 힘들 만큼 낮은 임금에 시달리고 있었다. 거기다가 인구는 너무 빨리 늘어나는 바람에 영국의 런던에서조차도 늘 25만 가구분 정도의 분뇨가 수거되지 못했다. 이런 열악한 생활환경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만성적인 질병과 전염병에 시달렸고, 노동자 가정의 영아 사망률은 90퍼센트에 이르렀다.
자본가들은 이런 도시를 피해 쾌적한 교외로 옮겨 갔다. 마르크스 사상의 '배경'이 되는 영국의 경우, 자본가들은 공해 물질이 바람을 타고 날아오지 않는 도시 서쪽으로 옮겨 가서 고급 주택가를 이루며 살았다. 돈은 도시에서 벌되, 부유한 이들끼리 모인 별천지에서 생활과 문화를 즐겼던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에 맞서는 자본가 계급, 곧 부르주아는 이렇게 생겨났다.
구두쇠 영감 스크루지가 등장하는 찰스 디킨스(Charles J. H. Dickens, 1812~1870)의 <크리스마스 캐럴>과 안데르센 (Hans C. Andersen, 1805~1875)의 <성냥팔이 소녀>가 이러한 시대에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돈만 알고 가난한 사람을 '범죄자'취급하는 스크루지는 당시 사람들의 머릿속에 박혀 있던 자본가의 모습이었고, 거리는 성냥팔이 소녀처럼 불쌍한 고아들로 넘쳐 나고 있었다.
대립하는 자유 경제과 공상적 사회주의
산업이 발달할수록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격차는 더욱 벌어졌고 대립과 갈등도 점점 더 심해졌다. 많은 이들이 극단으로 치닫는 세상에 대해 다양한 해결책을 내놓았지만, 그 처방이라는 것은 지금으로 치면 '빈민 구호' 수준밖에 되지 못했다. 그런 땜질식 처방은 임시변통이었을 뿐, 장기적으로는 결코 도움이 되지 못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점점 경멸과 동정의 대상으로 비참하게 추락해 갔던 것이다.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고 삶이 고단할수록 사람들은 평등하고 억압 없는 세상을 꿈꾸게 마련이다. 모두가 잘 사는 세상, 공산 사회를 위한 제안들도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상당수는 실현 가능성이 없는 돈키호테적 구상에 지나지 않았다. 영국의 사회 운동가 로버트 오언(Robert Owen, 1771~1858) 같은 자본가는 자신의 공장을 노동자들의 천국으로 개조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노동자들을 위한 교육, 복지시설에 완전한 양성 평등까지, 21세기형 복지 국가를 옮겨 놓은 듯한 이 공장은 그 당시 통념과는 너무도 차이가 있는 것이어서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이는 '생산 협동조합'을 만들어 노동자들이 이익을 서로 사이좋게 나누어 갖는 세상을 꿈꾸기도 했다. 또 어떤 이는 선거를 통한 노동자 계급의 해방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 치밀한 문제 분석이나 구체적인 실현 방안이 없는 공상에 지나지 않았다. 흔히 이들이 '공상적 사회주의자'라고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반면, 자본가들도 점차 거세지는 저항에 맞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론 체계를 세우기 시작했다. 지금의 이른바 '주류 경제학'은 이때 형성된 것이다. 이들은 경제적 문제의 책임과 권리는 각자에게 있다는 경제적 개인주의와, 정부의 간섭은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는 자유방임주의, 자유 경쟁, 자유 무역을 앞세웠다.
한마디로 못 사는 것은 개인의 문제일 뿐, 사회 구조의 결함 때문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들 또한 빈곤층이 점점 더 늘어가는 현실 앞에서 위기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극소수의 가진 자와 다수의 못 가진 자들이 극한적으로 대립하는 상황으로 치달을수록 세상은 어떤 식으로든 위태로운 갈등을 해소해 줄 사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심장에 칼을 들이대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이런 위기 상홍에서 혜성과 같이 등장했다. 그는 청년 시절 결투를 벌이고 '음주 가무'로 학생 감옥에 갇히는 등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냉철한 분석가 이기도 했다.
마르크스는 공산 사회를 꿈꾸는 이상주의였지만, 어떤 환상에도 빠지지 않았다. 그는 먼저 자본주의 메커니즘(mechanism, 작용원리)을 면밀히 분석했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내적인 결함 때문에 필연적으로 붕괴할 수밖에 없고 결국에는 노동자들이 지배하는 공산 사회가 이루어질 것이라도 결론지었다. 이전의 공산주의는 단순한 제안에 지나지 않았지만, 마르크스는 이에 대한 체계적이고도 과학적인 이론을 제시했다. 이 때문에 그는 최초의 '과학적 공산주이자'로 불린다.
마르크스는 물질의 발전이 인류 역사를 이뤄 나간다는 '사적 유물론(史的唯物論)'을 주장했다. 이미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그의 주장은 매우 당연하게 다가온다.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인 나라와 2만 달러의 나라 사이에는 가치관과 문화 등에 꼭 그만큼의 차이가 존재한다. 1000달러 시대의 우리나라가 후진국과 비슷했다면, 2만 달러 무렵에는 OECD 국가들과 비슷한 모습이라는 경제 관료들의 말에 우리는 쉽게 고개를 끄덕일 터이다. 하지만 종교나 걸출한 영웅이 역사를 이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당시에는, 물질이 세상을 이끈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은 무척이나 획기적인 것이었다.
나아가 그는 <자본론>에서 물질문명이 진보하고 산업이 발달하면 자본주의는 반드시 붕괴한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는 자유 경쟁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므로 강한 자는 살아남고 약한 자는 망한다. 경쟁이 심해지면 약자는 점점 사라지고 결국 몇몇 강한 자만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나 강한 자만 살아남는다는 결과는 강자 자신에게도 피곤한 일일뿐이다. 망한 회사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살아남은 기업도 어려워진다. 많은 기업이 도산하면 그만큼 일자리도 없어져, 물건을 살 수 있는 돈을 가진 사람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회사란 이윤을 내지 않고서는 지탱할 수 없는 집단이다. 물건이 팔리지 않는다면 생산 비용을 줄여서라도 이윤을 만들어 내야 한다. 따라서 물건이 팔리지 않으면 기업은 노동자들을 더 많이 해고하고 임금을 낮추기 시작한다. 임금이 떨어질수록 노동자의 구매력도 떨어져 기업의 이윤은 더더욱 줄어든다. 그러면 회사는 또다시 임금을 깎고 노동자를 해고하는 악순환을 거듭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악순환은 파탄 상태에 이른 대다수의 노동자들이 극소수로 압축된 자본가들은 '폭력 혁명'으로 제거하여 모두가 평등한 공산주의 사회가 되는 것으로 끝을 맺게 된다.
이 모든 주장은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연구 끝에 얻어진 결과였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환부에 메스를 들이대어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밝혀낸 철학자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까지의 철학은 세상을......... 해석해 왔을 뿐이다. 이제 중요한 문제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면밀한 논리에 기초한 그의 주장은 충분히 실현 가능한 것으로 비쳤고, 사람들은 마르크스가 꿈꾸던 세상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바야흐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한판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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