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8. 17. 09:00ㆍ역사
주권은 양도될 수 없다
위에서 도출한 모든 원칙으로부터 생기는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결론은, 일반의지만이 공공의 복지라는 국가 설립의 목적에 따라 국가의 모든 힘을 지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개개인들의 이해관계의 대립 때문에 사회 건설이 필요한 것이라면, 이들 이해관계의 일치가 사회 건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서로 대립되는 이해관계 속에 들어있는 공통적인 요소가 사회적 결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만약 이들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공통점이 없다고 한다면, 어떠한 사회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회는 이러한 공동이익을 기반으로 하여 통치되어야 한다. 따라서 나는 이렇게 주장한다. 주권은 일반의지의 행사에 불과한 것이므로 집합적 존재 그 자체에 의해서만 대표될 수 있다고. 권력은 양도될 수 있지만 의지는 양도될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때에는 개인의 특수 의지가 일반의지와 일치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 일치가 영속적이도 항구적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일반의지는 평등을 지향하지만 특수 의지는 그 성질상 불공평으로 기울어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설령, 이해관계의 일치가 항상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보증하기란 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주권자는,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 원하는 것, 또는 적어도 원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나도 실제로 원하고 있다"라고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의지가 미래에 대해서까지 자기를 구속하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고, 또 어떤 의지라도 그 의지를 가진 인간의 이익에 어긋나는 일에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인민이 복종하겠다고 손쉽게 약속만 한다면, 그 행위에 따라 주권자로서의 인민은 해체되고 그 자격도 상실하게 된다. 지배자를 인정하는 순간부터 주권자는 사라지고 정치체는 파괴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주권자가 지배자들의 명령에 반대할 자유를 갖고 있으면서 반대하지 않을 경우에도 지배자의 명령을 일반의지의 반영으로 볼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경우 인민 전체의 침묵은 동의를 뜻하는 것이라고 추측될 수 밖에 없다.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 가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주권은 분할 될 수 없다
주권은 양도 될 수 없는 것과 똑같은 이유로 분할될 수없다. 왜냐하면, 의지는 일반의지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즉 의지는 인민 전체의 의지이거나 아니면 그 일부의 의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민 전체의 의지인 경우, 그것은 특수 의지에 불과하며 다라서 행정기관의 행위로써, 기껏해야 일종의 명령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던 정치학자들은 원리상으로는 주권을 분할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대상에 따라 이를 분할하고 있다. 즉 그들은 주권을 힘과 의지고, 입법권과 행정권으로, 그리고 과세권, 사법권, 선전권 등으로 나누기도 하고, 국내 통치권과 대외 조약 체결권으로 나누기도 한다. 때로는 이 모든 부분을 혼합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분리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들은 주권자를 여러 개의 부분을 모아서 만든 가공적인 존재로 만들고 있다. 그것은 마치 인간을 만들되 눈만을 가진 부분, 팔만을 가진 부분, 또 다리만을 가진 부분, 이렇게 한 가지씩의 기능만을 갖고 있는 몸의 여러 부분을 한데 모아 하나의 인간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기야 일본의 어떤 마술사는 관중 앞에서 아이의 사지를 하나하나 뜯어내어 공중에 던진 뒤에 다시 이들을 모아 온전한 아이가 되어 땅에 떨어지도록 만든다는 이야기도 있다. 우리네 정치학자의 마술도 이와 꼭 마찬가지다. 그들은 시장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능란한 마술로 정치체를 여러 부분으로 분리해 놓고, 그다음에 우리로서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도 알 수도 없는 방법으로 그 부분들을 다시 모아 놓는 것이다.
이 오류는 주권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갖지 못한데서 오는 것이고, 또 주권의 발동에 불과한 것을 주권의 일부분이라고 잘못 생각한 데서 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선전포고와 강화의 행위는 주권 행위인 것으로 생각되어 왔으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행위는 법률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법률의 적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즉'법률'이라는 말에 대한 개념을 명백히 정의하면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이런 행위는 법률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특수한 행위인 것이다.
같은 방법으로, 주권이 분할되어 있다는 다른 주장들을 검토해 보면, 주권이 분할되어 있는 것처럼 보일 때에는 늘 잘못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주권의 일부라고 생각되는 권리들도 사실은 주권에 종속된 것이며, 따라서 항상 최고의지를 전제로 하여 최고 의지의 집행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정치적 권리에 관한 저자들이, 자기들이 세운 원칙에 따라 국왕과 인민의 권리를 판단하려고 할 때, 이 점에 관한 부정확성 때문에 스스로가 판단을 얼마나 모호하게 하였는지 측량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로티우스의 저서 제1권 제5장과 제4장을 보면, 이 저자와 그 역자 바르베라크가 자기들이 생각하는 바를 너무 지나치게 많이 말하거나 또는 지나치게 부족하게 말하지는 않았는지 두려워하고, 또 잘 조절해야 할 여러 이해관계를 해치지는 않았는지 두려워한 나머지 궤변에 빠져 얼마나 많은 자가당착을 일으키고 있는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로티우스는 자기 조국에 불만을 품고 프랑스에 망명하여, 루이 13세의 총애를 받고자 자기의 저서를 왕에게 바쳤는데, 거기서 그는 인민의 모든 권리를 빼앗아 그것을 왕에게 부여하기 위하여 온갖 기교를 다 부렸던 것이다. 그 역서를 영국의 조지 1세에게 바친 바르베라크의 의도도 이와 비슷한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가 양위라고 표현했던 제임스 2세의 추방으로 말미암아 윌리엄 왕이 왕위 찬탈자라는 누명을 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는 할 수 없이 신중한 표현으롤 말을 돌려 우물쭈물 얼버무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했더라면 그들은 몹시 괴로운 심정으로 진리를 말했을 것이고, 또 인민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충성을 바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진리란 결코 행운에 이르는 길이 아니며, 인민은 자기에게 충성을 바치는 자에게 대사직이나 교수직 또는 연금을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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