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8. 29. 19:02ㆍ역사
법률에 대하여
사회계약에 따라 우리는 정치체에 존재와 생명을 부여했다. 이제 입법에 따라 정치체에 운동과 의지를 부여하는 문제가 남아있다.
왜냐하면, 정치체를 구성하고 결합하는 최초의 행위는, 정치체가 자기 보존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하는 사항까지 규정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질서에 따라 바르게 사는 것은, 인간 상호간의 계약과는 관계없이 사물의 본성에 따라 그러한 것이다. 모든 정의는 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신만이 정의의 원천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와 같이 높은 곳에서 정의를 받아들일 줄 알았더라면, 정부도 법률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물론 오직 이성에서만 나오는 보편적 정의가 있다. 그러나 이 정의가 우리들 사이에서 인정되려면 상호적이어야 한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사물을 판단한다면, 정의의 법은 자연의 제재를 수반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들 사이에서는 효과가 없다. 다시 말하면, 선량한 사람은 모든 사람에 대하여 정의의 법을 지키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선량한 사람에 대하여 이법을 지키지 않을 때, 이 법은 악한 인간에게는 이익을 주고 선량한 인간에게는 손해를 주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권리와 의무를 결합시키고 정의를 그 대상에게 적용시키기 위해서, 약속과 법률이 필요하게 된다. 자연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공유이므로, 내가 아무것도 약속한 바 없는 사람에 대하여 나는 아무런 의무도 지지 않는다. 나는 내게 불필요한 것만을 남의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화 상태에서는 법률에 따라 모든 권리가 규정되어 있으므로 이와는 사정이 다른다. 그러면 도대체 법률이란 무엇인가? 이 말에 형이상항적 관념만을 결부시켜 만족하는 한, 우리는 아무런 결론에도 도달하지 못한 채 논쟁만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연의 법이 무엇인가를 정의했다고 해서 국가의 법이 무엇인가를 더 잘 정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이미 개별적인 대상을 상대로 하는 일반의지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실제로 개별적인 대상은 국내에 있을때도 있고 국외에 있을 때도 있다. 그것이 국외에 있는 경우라면, 국가와 관계가 없는 의지가 국가와의 관계에서 일반적일 수는 없다. 또 그것이 국내에 있는 경우라면, 그것은 국가의 한 부분이 된다. 그렇게 되면 전체와 부분과의 사이에는 양자를 별개의 존재로 만드는 하나의 관계가 성립되는데, 그 하나는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이 부분을 제외한 전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부분을 제외한 전체는 전체일 수가 없다. 이와 같은 관계가 존속하는 한, 전체란 있을 수 없고 불균등한 두 부분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편의 의지는 다른 편과의 관계에서 보면 결코 일반적일 수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그러나 전 인민이 그들 전체를 대상으로 법을 규정할 경우에는 오직 인민 자신의 문제만을 고려하게 된다. 이때 어떤 관계가 형성되더라도 그것은 대상 전체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서 생기는 것이지, 전체에 어떤 분열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면 법이 적용되는 대상도 법을 규정하는 의지와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것이 된다. 내가 법률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런 행위인 것이다.
내가 법률의 대상이 항상 일반적이라고 하는 것은, 법률은 시민을 전체로서 그리고 행위를 일반적인 것으로서 고려할 뿐, 결코 인간을 개인적으로 그리고 행위를 개별적으로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법률은 어떤 특권을 설정하여 규정할 수 있지만, 그러한 특권을 어떤 사람에게 지명해서 부여할 수는 없다. 또 법률은 시민을 여러 계급으로 나누고 그러한 계급에 소속하게 될 자격까지도 규정할 수는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 이러한 계급에 소속하게 되는가를 지명하여 규정할 수는 없다. 법률은 나아가 군주제나 왕위 세습제의 확립을 규정할 수는 있지만, 왕이나 왕가를 지명하여 선출할 수는 없다. 요컨대 개인을 대상으로 규정하는 어떠한 기능도 입법권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볼 때, 입법행위란 일반의지의 행사에 불과하고 따라서 입법의 권한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것은 물어볼 필요조차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군주도 국가의 한 구성원에 불과하기 때문에, 군주가법률위에 있느냐는 것도 물어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그 누구도 자기 자신에게 불공정할 수는 없기 때문에, 법률이 불공정할 수 있느냐는 것도 물어볼 필요가 없고, 나아가 법률이란 곧 우리의 의사를 기록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가 자유로우면서도 어떻게 법률에 복종할 수 있는가 하는 것도 물어볼 필요조차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아가 법률은 의지의 보편성과 대상의 보편성을 결합하고 있는 것이므로 누구의 명령이든 자기의 개인적 동기에서 나온 명령은 법률이 될 수 없다는 사실도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주권자의 명령이라도 그것이 개별적 대상에 대한 명령인 경우에는 법률이 아니라 행정명령이며, 주권자의 행위가 아니라 행정기관의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나는 어떠한 정부 형태를 취하든지 간에, 법률에 따라 지배되는 모든 국가를 공화국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국가가 법률에 따라 지배될 경우에만, 공공의 이익이 우위를 차지하고 공공의 것이 중요성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합법적인 정부는 모두 공화적이다. 정부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뒤에 설명하겠다.
법률이란 본래 사회적 결합의 조건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인민은 법률에 복종하지만, 그 제정자가 되어야 한다. 사회적으로 결합하는 자들만이 사회의 조건을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회의 조건을 어떻게 규정하는가? 공동의 합의에 기댈 것인가? 또는 갑작스런 영감에 기댈 것인가? 정치체는 그 의사를 발표할 기관을 가지고 있는가? 정치체가 그 법령을 작성하고 공포하는데 필요한 선견지명을 누가 미리 정치체에게 줄 수 있는가? 다시 말하면, 정치체는 어떻게 하면 필요한 때에 법령을 공포할 수 있는가? 무엇이 자기에게 이로운가를 잘 모르기 때문에 종종 자기가 원하는 바를 분명히 알지 못하는 무지한 군중이 어떻게 하여 입법 조직과 같은 중대하고도 어려운 사업을 스스로의 힘으로 수행할 수 있는가? 인민은 항상 스스로가 자신이 행복은 원하기는 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그 행복이 무엇인지를 항상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일반의지는 항상 올바르지만, 그것을 인도하는 판단이 항상 현명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일반의지에게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또 때로는 있어야 할 형태로 보여주어야 하고, 일반의지가 찾고 있는 바른길을 가르쳐 주어야 하며, 특수의지의 유혹으로부터 일반의지를 보호하고, 또 시간과 장소에 유의하여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이익의 유혹과 멀리 숨어있는 위험을 비교할 수도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개인은 참된 행복을 보고도 그것을 배척하는 수가 있고, 공중은 행복을 바라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한다. 양쪽 모두를 지도해 줄 필요가 있다. 개인들에게는 그들의 의지를 이성에 일치시키도록 강제해야 하고, 공중에게는 그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공중은 계몽되어 정치체에 있어서 그들의 이익이 무엇인지를 완전히 이해하게 되고, 따라서 각 부분의 정확한 협력이 이루어져 전체는 최대의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입법자가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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